과거로부터 배우라
고전 10:1-13 (2010년 3월 7일 주일예배)
교회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세상으로부터 불러냄 받은 무리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것 같으면, 오늘 본문에 언급되어 있는 이스라엘 공동체는 하나의 교회인게 분명합니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 역시 애굽에서 광야로 불러냄 받은 이스라엘 공동체를 하나의 교회로 규정하고 있는 겁니다.
이스라엘 무리를 이끌었던 영적 지도자는 모세였더랬는데, 그의 인도를 받아 그들은 광야에서 집단적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받은 세례는 오늘날 세례의식과는 같지는 않고, 상징적인 의미에서의 세례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빠져나와 때 홍해를 건넜던 사건을 세례로 해석했던 것입니다. 다음의 이유를 고려해보면 사도 바울의 해석이 옳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첫째,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빠져나온 것은 세상으로부터 분리된 것입니다 (세례는 죄로부터 단절을 의미합니다). 둘째, 이스라엘 백성이 구름으로 뒤덮인는 홍해를 건너갔던 것은 그들이 완전히 물 속으로 들어갔던 것입니다 (세례는 물 속에 잠기는 의식을 통하여 세례 받은 사람이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났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사도 바울은 교회로서 이스라엘 백성은 신령한 떡과 음료를 마심으로써 성만찬에 동참했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그들이 먹었던 신령한 떡이란 하늘로부터 내린 만나를 의미하고, 그들이 마셨던 신령한 물은 반석에서 나온 물을 의미합니다. 오늘날 교회가 예수님의 몸과 피를 상징하는 빵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듯, 이스라엘 백성은 하늘에서 내린 떡과 그리스도를 싱징하는 반석에서 솟아나온 물을 먹고 마셨던 것입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무리를 교회로 보는 사도 바울의 입장에 동의하면서, 오늘 설교에서 나는 그 모임을 “광야교회”라고 부르고자 합니다. 광야교회는 역사상 한 교회로서 가장 큰 규모의 교회였던 셈입니다. 무려 그 숫자가 250만 정도가 되었다고 추정하고 있으니까요.
하나님의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광야에서 그들을 밤낮으로 지켜주었습니다. 홍해가 열리면서 그들은 마치 육지 위를 걷듯 바다를 걸어서 건널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주시고, 필요할 때는 반석에서 물이 솟아나와 그들의 갈증을 해소해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과 언약을 맺으사 영원토록 그들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고,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실 것이라 약속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에게 직접적으로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나는 그 광야교회를 생각하노라면 정말로 부럽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여러분은 그렇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토록 축복된 광야교회에 속했던 다수의 사람은 그토록 꿈 꾸었던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그만 광야를 자신들의 무덤으로 삼아야 했습니다. 왜?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5a절) 하나님께서 그 교회의 대다수 사람들을 기뻐하지 않으셨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어떤 이유에서 하나님께서 그 교회를 기뻐하지 않으셨던 것인가요? 사도 바울은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네 가지로 밝히고 있습니다: 우상숭배, 음행, 주를 시험, 원망.
첫째, 그들은 우상숭배했습니다 (출 32장). 모세가 하나님의 계명을 받으러 시내산에 올라가 있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가 더니 내려오자 광야에서 자신들을 인도해 줄 신을 만들어 내라고 아론에게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들은 자신들의 아내와 자녀의 귀에서 금고리를 가져다가 송아지 형상의 우상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렇게 외쳤다고 하지요?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 (출 32:4c). 그리고 그 금송아지 앞에 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고, 그 앞에 앉아서 먹고 마셨으며, 춤 추며 뛰어놀았습니다. 하나님을 금송아지 형상으로 바뀌어 버린 참으로 엄청난 죄를 범했던 것입니다.
둘째, 그들은 음행했습니다 (민 25장). 이스라엘 백성이 싯딤에 머물러 있었을 때, 그들이 모압 여인들과 음행하기 시작했습니다. 모압 여인들과 사랑에 빠지자, 그 여인들이 자신들의 신들에게 제사하는 곳까지 초대 받아 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들은 모압 여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이방 신들에게 절함으로써 그만 우상숭배자들이 되어버렸습니다.
셋째, 그들은 하나님을 시험했습니다 (민 21장). 이스라엘 백성이 호르 산을 떠나 홍해로 가는 길을 따라갔습니다. 그 길로 들어선 것은 에돔 사람들의 지역을 돌아서 가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백성은 인내심을 갖지 못하고, 그만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말을 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불뱀들을 백성 가운데로 보내어 물게 하시므로 수많은 자가 죽었습니다.
넷째, 그들은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민 14장). 이스라엘 백성이 바란 광야 가데스라는 곳에 머물러 있었을 때, 가나안 땅을 탐지하고 오도록 각 지파 중에서 족장 된 자 한 사람씩 선별해서 보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40일 동안 가나안 땅을 돌아본 후 돌아와 보고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오직 갈렙과 여호수아를 제외한 나머니 열 정담꾼들이 가나인 사람들의 장대한 키와 힘 센 것과 그들의 성이 철옹성처럼 튼튼한 것을 보고하며 이스라엘이 그 땅을 절대로 정복해서 취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하자 온 이스라엘의 마음이 녹았습니다. 그들은 갈렙과 여호수아의 말을 듣지 않고, 밤새도록 부르짖으며 곡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을 광야로 인도해 낸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면서 한 장관을 세우고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겠다고 아우성쳤습니다.
물론 광야교회의 첫 출발은 좋았습니다. 무척 웅장하기까지 했습니다. 원하는 약속의 땅에 금방이라도 들어갈 것 같은 희망으로 뜰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광야 여정 가운데 길을 잃었습니다. 우상을 숭배함으로써 하나님을 배신했습니다. 음행했습니다. 하나님을 시험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 다수가 약속의 땅을 보지도 못하고 광야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아마도 이곳에 앉아 계신 여러분 대다수가 위의 성경 이야기를 잘 알고 계실 겁니다. 지금까지 수없이 반복해서 듣고 또 들었을 테니까요. 하지만 성경 이야기를 아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하여 교훈을 얻고 삶 속에서 실천하려는 노력이 중요하겠지요. 그래서 사도 바울께서 6, 11절에서 이렇게 권면하지 않습니까? “이러한 일은 우리의 본보기가 되고,” “그들에게 일어난 일은 본보기가 되고.” 지난 주간 오늘 본문을 묵상하면서 과거를 통해 배움을 얻는 방법을 생각해 보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이렇습니다.
과거를 통해 배움을 얻는 방법:
첫째, 사람의 죄와 그가 받은 심판을 정죄하지 말라.
우상숭배하고, 음란을 행하고, 주를 시험하며, 원망하다가 결국 광야에서 죽었던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을 정죄하려 하지 마십시오. 물론 그들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받아 죽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정죄할 권리가 우리에게 있지 않습니다. 많은 경우 다른 사람을 정죄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의롭게 여긴다든지 은근히 자신의 의를 드러내 보이려는 어리석음을 범합니다. 하지만 판단과 정죄는 절대적으로 하나님께 속한 영역입니다.
둘째, 과거를 스승으로 삼으라.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6절)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11절)
“과거를 통해 배우고, 현재를 자세히 살펴보며, 미래를 창조하라.”는 말이 있지요? 그렇습니다. 과거는 현재와 미래를 위한 스승입니다. 과거의 성공 경험도 많은 교훈을 주겠지만, 과거의 실수와 실패 역시 숱한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과거의 성공은 계속 생각하고 싶어 해도 과거의 실수와 실패는 가능하면 잊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지난 과거의 성공에 너무 의존하려 하지 말고, 오히려 과거의 실수나 실패로부터 배우려는 노력을 더욱더 가져야 합니다. 사실 나는 이렇게 믿습니다: 과거의 성공보다는 실수나 실패가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위해 더욱 많은 교훈을 줍니다. 고로 과거에 실수했다고 해서, 과거에 어떠한 잘못을 범했다고 해서 좌절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러한 실수와 잘못을 깊이 후회하고 반성한 후 그런 어리석은 모습을 하나님의 은혜에 내어맡기고, 이젠 새로운 삶을 위한 변화를 추구하십시오.
셋째, 늘 자신의 연약함을 인식하라.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11, 12절)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할 수 있습니다. 아니 사실은 우리 모두가 죄를 범하며 살아갑니다. 고로 타인의 죄악과 그 죄악의 결과를 보고서 자기 자신을 돌이켜보는 계기를 삼으십시오. 우리 역시 그러한 죄악 속으로 빠져들 수 있는 연약한 존재임을 기억하는 계기를 삼으십시오. 그리고 그와 같은 죄악 속으로 빠져들지 않도록 조심하고 또 조심하십시오.
넷째, 죄의 유혹 가운데서도 미쁘신 하나님을 신뢰하라.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13절)
우리가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결코 죄의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사탄이 끊임 없이 공격해 오기 때문입니다. 고로 유혹을 받을 때, 미쁘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절대적으로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유혹을 잠시 허락하셨을지라도, 그 분은 계속해서 우리를 지켜주시고, 유혹을 이겨낼 수 있도록 도우실 것이며, 우리가 유혹으로부터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자, 이제 겸허한 자세로 우리 자신과 교회를 돌이켜 봅시다. 과연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무리일까요? 아니면 우리 자신을 기쁘게 하는 무리일까요? 만약 교회로서 우리가 하나님보다 다른 무엇인가를 우선시 여긴다면, 그것은 분명히 우상숭배입니다. 오직 하나님만 경외하고 예배하기 위해 모이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모임은 그 이상, 그 이하의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하나님답게 삶이 청결해야 합니다. 몸을 더렵혀서는 아니 됩니다. 결혼생활을 성스럽게 여겨야 합니다. 음행하지 말아야 합니다. 육체에 해가 될 만한 것은 삼가야 합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절대로 하나님을 시험해서는 아니 됩니다. 하나님은 시험의 대상이 아니라 경배의 대상이자 신뢰의 대상입니다. 마지막으로, 어떠한 환경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향해, 또는 다른 사람을 향해 원망의 말을 하는 어리석은 자들이 되지 마십시오. 누구를 원망하든, 원망의 가장 피해자는 자기 자신일 수 밖에 없습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