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데로 가라
누가복음 5:1-11; 이사야서 6:1-13 (2010년 2월 7일 주일예배)

 

emoticon웃시야. 그는 왕 위에 올라 52년 동안 남왕국 유다를 다스렸던 왕이었습니다. 그는 왕이 되어 하나님 말씀대로 충실하게 나라를 이끌어서 백성으로부터 큰 칭송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훗날 교만에 빠져 제사장들만이 집행했던 성전 제단의 향을 스스로 피우려고 고집부렸다가 그만 하나님께서 치심으로 문둥병에 걸려 왕좌를 아들에게 넘겨주고 별실에 홀로 거주하다 외로운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습니다.

 

웃시아가 슬픈 죽음을 맞이했던 그 해에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이상이 이사야에게 임했습니다. 이사야는 드높은 보좌에 앉으신 여호와 하나님을 뵈옵게 되었는데, 그 분의 옷자락이 성전을 가득 채우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분 위에 서 있는 스랍들(천사들)도 보았는데, 그들은 각각 여섯 날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두 날개로는 자기들의 얼굴을 가리우고, 두 날개로는 발을 가리우고, 두 날개로는 날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이렇게 큰 소리로 노래했습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3절)

 

이 황홀한 광경을 보는 순간 이사야는 큰 두려움에 사로잡혔고, 그와 동시에 이렇게 외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5절) 죄인인 사람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뵈옵게 되면, 그는 정녕 죽는다는 전통적 가르침을 그는 익히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 중에 하나님을 뵈었지만 그는 죽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두려움 가운데 떨고 있는 이사야에게 스랍 (천사) 하나를 보내셨습니다. 그 스랍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핀 숯을 집어 꺼낸 후 그것을 가지고 날아와 이사야의 입술에 대며 외쳤습니다.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7절) 스랍이 가져온 숯불로 자신의 입이 지져질 때, 이사야가 어떤 느낌을 받았는지 모르겠습니다. 뜨거웠을까? 두려웠을까? ‘어이코, 이렇게 죽는 것인가?’ 싶기까지 했을지도 모릅니다. 분명한 것은 그때 그는 제 정신이 아니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 일이 있고 난 후 하나님의 음성이 이사야의 귀에 다시 들려왔습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러자 이사야가 즉시 대답합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위의 이야기는 이사야서 6:1-8에 나오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도록 이사야를 부르신 사건입니다. 그리고 교회력이 제시하고 있는 본문들 가운데 하나인 누가복음 5:1-11에서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고 있는데, 그것은 이렇습니다.

 

어느 날 예수께서 갈릴리 호숫가를 찾으셨는데, 그 날 역시 수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그로부터 말씀을 듣고자 했습니다. 예수께서 계시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가서 말씀을 듣고자 했던 그 무리의 열심이 부럽습니다. 바로 이러한 열심을 우리 역시 본받아야 하지 않을까요?

 

수많은 사람들이 말씀을 들으러 나아오자 예수께서는 말씀을 선포할만한 마땅히 자리를 찾으셨습니다. 주변을 둘러보시다가 저만큼 떨어진 곳에 두 척의 배가 머물러 있는 것을 발견하셨는데, 그 배 주인들은 밤새 작업을 하고서 이제 뭍으로 나와 그물을 씻는 중이었습니다. 그들은 무척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밤새 그물을 던졌지만 한 마리의 고기도 낚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그 배의 주인에게 허락 받으신 후 배에 오르셨습니다. 물론 예수께 나아왔던 무리 역시 그를 따라 그 배 앞쪽으로 몰려들었습니다. 배에 오른 예수께서 그 배의 주인에게 배를 육지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으로 옮겨 달라 부탁했습니다. 그래서 배가 적당한 곳으로 옮겨지자 예수께서 자리를 잡고 앉아 무리에게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말씀 속으로 초대 받은 시몬 베드로

 

오늘 설교 준비차 말씀을 묵상하던 중 나는 바로 이 부분에서 이런 궁금증을 가졌습니다. “왜 예수께서는 굳이 배에 올라타시려 하셨고, 또한 그 배를 무리로부터 약간 떨어진 곳으로 이동하도록 하셨을까?” 청중을 한 눈으로 바라보면서 말씀을 선포하기 위해서였을까요? 곧 더욱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기 위해서였을까요? 글쎄요. 그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말씀 묵상 중 내가 깨달은 바는 이렇습니다. 예수께서 굳이 배에 올라타시고 그 배를 육지로부터 약간 떨어진 곳으로 옮긴 후 무리에게 말씀을 선포하신 것은 그 무리를 위함이라기 보다는 그 배의 주인을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 무리를 위하셨다면 가능한 한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야 합니다. 그리고 굳이 배에 오르실 필요없이 해변가 어느 곳에 자리 잡고 말씀을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배에 올라타신 후 무리와 일정한 거리를 두시고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무리로부터 거리를 두었기에 예수께서는 상대적으로 목소리를 높여 말씀해야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말씀을 선포하신 곳은 우리가 앉아 있는 이 교회처럼 폐쇄된 공간이 아니라 사면이 열려 있는 해변가였던 점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고로 재아무리 바람을 잘 이용해서 소리를 전달해도 목소리를 높이지 않으면 아니 되었습니다. 얼마나 오랫 동안 말씀 선포가 이루어졌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모르긴해도 꽤나 긴 시간이었을 겁니다. 보통 예수께서 말씀을 선포하실 때는 30분이나 한 시간 정도가 아니라 몇 시간이 소요되었습니다.

 

한편으로, 예수께서 소리를 높여 외치셨던 그 기나긴 시간동안 한 배에 있었던 그 배의 주인이었던 시몬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긴 막대기로 배가 흔들리지 않도록 고정시키는 일에만 집중하고 있었을까요? 물론 그는 배가 흔들리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정말로 그가 그 일만 하고 있었을까요? 혹시 그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고 있진 않았을까요? 그렇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 누구보다도 예수님의 말씀을 크고 분명하게 듣고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긴 시간동안 우렁차게 선포된 예수님 말씀은 그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는 그 긴 시간동안 말씀에 절여지고 절여져서 결국 온전히 절여졌습니다.

 

깊은 바다 속으로 초대 받은 시몬 베드로

 

무리에게 가르치기를 마친 이후 이젠 예수께서 시몬에게 직접 말씀을 건네셨습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뭐라구요? 다시 호수로 되돌아가서, 그것도 깊은 데까지 배를 끌고가서 그물을 내리라구요? 말도 아니되는 요구입니다. 시몬이 누구입니까? 그는 고기잡는 일에는 베테랑입니다. 갈릴리 호수는 자기 손바닥 보듯 뻔히 꿰뚫고 있었습니다. 그는 갈릴리 호수에서 한평생 고기 낚으며 살아왔던 어부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수없는 경험을 통해 어느 시간 대에, 어느 곳으로 가서 그물을 내려야 고기를 잡을 수 있는지 익히 잘 알고 있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그의 오랜 경험은 지금은 고기를 낚을 시간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 바로 그 시간에 깊은 데로 배를 끌고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요구했습니다. 시몬의 오랜 고기잡이 경험과 예수님의 말씀이 정면으로 맞부딪친 순간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하게도 시몬이 예수께 이렇게 화답합니다.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5절) 바로 이 순종의 자세는 말씀으로 충분히 절여졌을 때에 비로서 가능합니다. 이것은 말씀으로 큰 도전을 받았을 때 비로서 가능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여 들을 때, 그 말씀이 우리의 마음을 도전하고, 말씀에 큰 은혜를 받도록 하며, 결국 우리로 하여금 말씀에 즉시 순종하도록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으로 깊게 들어가면 갈수록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신뢰하게 됩니다. 말씀을 듣고서도 ‘아냐, 이것은 아니야. 이것은 비이성적이고, 비논리적이며, 현실에 근거를 두지 않고 있어.’ 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아직까지 말씀 속으로 깊게 들어가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감정, 이성, 논리, 지식, 경험을 초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천지가 지음 받았습니다. 곧 하나님의 말씀은 나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음 받았습니다. 곧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은 우리의 감정, 이성, 논리, 지식, 경험보다 앞서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깊은 데로 나아가십시다. 이제 좀더 깊은 데로 나아가십시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도전을 받는 즉시 그 말씀에 순종하십시다. 그리고 우리 역시 시몬처럼 이렇게 외치십시다.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오늘 본문 6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그렇게 하니.” 말씀에 의지하여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졌더니,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가 잡혔습니다. 할렐루야! 너무 많은 고기가 그물에 걸려들었기에 시몬은 다른 배에 있던 동료들에게 손짓해서 와서 도와달라고 했고, 그들이 와서 두 배에 고기를 가득 채웠는데 잡은 고기들로 인해 두 배가 물에 잠길 정도가 되었습니다.

 

뜻하지 못했던 수많은 고기를 잡고서 놀라워하고 기뻐하는 어부들의 얼굴을 상상해보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그 어부들이 부럽습니까? 그들이 낚아올린 수많은 고기가 부럽습니까? 그들을 부러워 말고, 그들이 얻은 큰 수확을 부러워하지 말고, 우리 역시 말씀에 의지하여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십시다. 많은 사람들이 남들의 성공을 보고서 부러워 하면서도 정작 그들이 성공하게 된 과정은 간과하지요. 그들처럼 성공하기 원한다면, 그들의 성공 비결을 배워서 실천해야 합니다.

 

새로운 인생의 여정으로 초대 받은 시몬 베드로

 

수많은 고기를 건져올린 후 시몬은 예수께서 누구신지를 깨닫게 되었고, 그 분 앞에 납작 엎드려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설교 서두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서 외쳤던 이사야의 고백을 기억하십니까?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5절) 하나님을 경험한 자,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한 자는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습니다. 도저히 거룩하신 그 분 앞에 감히 서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닫고서 엎드립니다. 혹시 여러분은 그러한 경험을 해보셨는지요?

 

자신의 무릎 아래 엎드린 시몬의 등을 다둑거리시면서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10절) 말씀 속으로 초대, 깊은 바다 속으로 초대, 그리고 이제는 사람을 낚는 인생으로의 초대입니다. 꿈 가운데 가장 위대한 꿈은 사람을 낚는 꿈입니다. 부나 명예가 아니라 사람을 살리고 변화시키는 일입니다. 굳이 자신이 어느 정도로 성공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지 확인해보고 싶다면, 얼마나 많은 재물을 축적했는지, 얼마나 많은 땅과 집을 사들였는지, 얼마나 높은 자리에 올랐는지를 헤아리지 말고,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끼쳤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곧 나로 말미암아 삶이 변화된 자들의 숫자가 내 인생의 성공을 측정하는 잣대(기준)라는 이야기입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이 위대한 꿈 속으로 하나님은 이사야를 초대하셨습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위대한 꿈 속으로 예수께서는 시몬 베드로를 초대하셨고, 그의 동료 어부들을 초대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여전히 지금도 이 위대한 꿈 속으로 초대하고 계십니다. 나와 여러분을.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그렇다면, 하나님의 초대에 우리의 반응은 어떠해야 할까요? 이사야처럼 이렇게 화답해야 하지 않을까요?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시몬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처럼 우리 역시 즉시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님을 따라야 하지 않을까요?

 

사람을 변화시키는 위대한 일에 동참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그 초대를 개인적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초대가 내 자신에게 임한 하나님의 초대라고 믿고서 그것에 동의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사람을 변화시키는 위대한 일을 위해 과감히 양보하는 노력이 요구됩니다. “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11절) 내가 안주하고 싶어하는 것, 나를 편하고 안락하게 만들어주는 것, 내가 추구하는 꿈과 야망을 희생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이 위대한 사역에 동참할 수 없습니다. 희생한만큼 위대한 사역 속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곧 희생없는 열매는 없습니다.

 

시몬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은 그날 거두어들였던 그 많은 고기들과 자신들의 배, 어부로서의 경력, 친구들과 가족을 뒤로 하고서 위대한 꿈을 찾아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희생은 결코 헛되지 않았습니다. 훗날 그들을 통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였고, 구원 받았으며, 삶이 변화되었습니까? 그리고 2천 년이 지난 이후에도 그들은 여전히 우리에게 기억되어 있는데 갈릴리 호수의 어부들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을 살리고 변화시켰던 위대한 사도들로서 말입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사람과 짐승의 차이점의 차이점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인생살이는 비지네스와 같은 맥락입니다. 투자한만큼 얻을 수 있습니다. 투자한다는 것은 위험 감수를 요구합니다. 현명한 투자를 하는 사업가가 성공하듯, 가치 있는 일에 투자한 사람이 성공한 인생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고로 여러분이 지금 소중히 여기고 있는 것을 가치 있는 일, 선한 일, 진정 최고로 위대한 일과 맞바꾸십시오. 기억하기 바랍니다. 우리가 삶을 살아가면서 투자할 것 중 가장 최고의 투자는 사람을 살리고 변화시키는 일이라는 사실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시간부터 여러분 역시 이 귀한 삶의 여정에 동참하지 않으시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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